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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ary

1년의 휴가 꿈이 아니길, 셰익스피어 배케이션






라마라는 동물은 내게 1957년 뉴욕의 타임 스퀘어에 나타났다가 도시의 무언가에 화들짝 놀란 나머지 황급히 택시를 타고 제 고향 안데스의 고산지대로 귀향한 후 도시에 나타나지 않는 신비롭고 비현실적인 생명체 같은 것이었다. 인지 모라스 라는 매그넘 사진작가 중 가장 낭만적이고 비현실적인 사진을 찍었던 여성 작가가 있는데, 그녀의 사진을 통해 라마라는 동물에 대해 처음 알게 된 사람들은 나처럼 이런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고 있을 터이다.


김경의 <셰익스피어 배케이션>. 언제쯤 나도 그녀처럼 여유롭고 호기롭게 미지의 땅 곳곳을 밟을 수 있을까. 언제쯤 나도 그녀처럼 다시는 서울로 돌아오지 않으리란 뜨거운 각오를(다시 돌아오게 되더라도) 가슴 깊이 품을수 있을까.

패션잡지 기자로, 또 칼럼리스트로 잘 나가던 커리어우먼은 여행지 선택도 머묾의 의식도 남달랐다. 대실 해밋의 <몰타의 매>를 들고 찾은 몰타를 시작으로 이탈리아 로마 근교의 작은 도시 만델라, 그곳 작은 고성에서 만끽한 나른한 게으름. 카프리 해변에서 즐긴 럭셔리한 요트 경기, 베네치아에서 30분 거리의 레이스의 본고장 브라노, 가끔 염소와도 부딪힌다는 리스본의 알파마 그리고 슬픈 가락 파두.  


영화에나 나올법한 그녀의 1년 동안의 휴가길을 동행하다보니 문득 구름 한 점 올려다 보지 않는 나의 무미건조한 일상과 마주친다. 나름 넘쳤던 끼와 열정은 어디에 던져뒀을까. 그녀만큼은 아니래도 언제든 바람처럼 사라졌다 나타나는 용감한 작은 나였는데. 불현듯 집어든 책 한 권이 굳은 흙처럼 허옇게 변해버린 심장을 톡톡 두드린다. “문 좀 열어봐봐... 네 진짜 얼굴 보고싶어.”





<셰익스피어 배케이션>의 표지를 장식한 라마의 사진이 어쩌면 합성이 아닐까 생각했다. 얕은 의심이 풀리는 순간, 사진작가 인지 모라스Inge Morath 를 찾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토록 아름답게 피사체와 소통한 사람은 누굴까. 이거야 말로 또 다른 결정적 순간이구나.

사진기 두 개를 목에 걸고 다리를 쭉 벌려 사진찍기에 여념이 없는 인지 모라스를 보았다. 중년의 여인과 카메라가 몹시도 잘 어울리는 사실이 김경의 꽁무리를 쫒다 위축되고 만 내게 작은 위로를 준다. 셀프 포트레이트 속 늙어버린 그녀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신비롭다. 시공간의 숨결 그대로를 움켜잡은 그녀의 사진들이 마음을 흔든다.

바로 지금,
뭘 배우고 본받고 그런 문제들을 모두 떠나 마음이 동하고 있는 것만 느끼고 싶다. 나 아직 그대로 숨 쉬고 있다는 것만.





셰익스피어 배케이션 - 8점
김경 지음/웅진지식하우스(웅진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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