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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ary

산티아고 가는 길




"나는 길의 감식가야. 평생 길을 맛보면서 살 수 있어. 이 길은 영원히 끝나지 않아. 어디든지 갈 수 있어. 영화 'My own private Idaho'에서 리버 피닉스가 읊조린 말이다. 영화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요절한 천재 배우 리버 피닉스 때문이었을까. 길 감식가라는 말은 준과 지니의 청춘을 지배했던 말이다.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오래 전부터, 아주 오래 전부터 두 여자는 이미 길에 중독되어 있었다."

<산티아고의 두 여자 >

아주 오래전부터 책장에 꼽혀 있던 이 책을 손에 집은 건 정말이지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저 나른한 오후를 때워볼 심산 이었다. 낮잠을 좀 자고 싶었는데 쉽게 잠들지 못했기에 어쩌면 읽다가 지쳐 단잠에 빠지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유독 자주 눈에 띄었지만 표지도 제목도 마음에 안 들어 미뤄뒀던<산티아고의 두 여자>. 잠들기 전까지 몇 장만 읽고 쫑 낼 생각이었다.


2000년 전 예수님의 제자 야고보의 시신이 묻힌 곳, 1200년 전부터 수많은 순례자들이 생명을 걸고 순례한 곳 산티아고. 산티아고. 산티아고... 피곤한 눈꺼풀이 이마 아래로 바짝 올라붙었고 몽롱한 정신이 깨었다. 그건 불현듯 길을 떠나 무작정 걷기 시작한 두 여자가 특별해서, 글발이 맛깔스러워서는 아니었다.

오히려 책은 모든 것이 평범했다. 고행을 결심하기까지의 심정도 과정도 예상 가능한 것이었다. 떠남과 함께 다급하게 시작되는 이야기는 첫날부터 서른다섯째 날까지의 감상에 젖은 일기와 약간의 기록을 더해 쓰였다. 챕터와 챕터 사이에는 걷는 동안 마주한 특별한 인연들에 대한 소개가 삽입됐고 숙소, 도시, 음식에 관한 정보가 자그마하게 덧붙여졌다. 누가 뭐래도 평범한 기행문 스타일을 벗어나지 않았다.



평범함의 자극과 울림은 예상 외로 크고 깊었다. 카미노 데 산티아고. 멀고도 낯선 그래서 가늠할 수 없는 산티아고 가는 길. 지평선 끝없이 펼쳐진 길. 7Kg의 배낭과 함께 한 2달간의 대장정. 피할 수 없었던 세찬 폭우. 끈질기게 괴롭히는 발가락의 물집들, 스페인의 구석구석과 마을마다 세워진 작은 성당들. 알아듣지 못하지만 느낄 수 있었던 그곳에서의 미사.

이 모든 걸 적어내린 담담한 글을 읽다 보니 어느새 그 길에 올라 서 있었다. 어느 곳에선 지나가 되었고 또 어디선 준이 되었다. 그들이 힘들어 눈물을 훔칠 땐 나도 울컥했고 도착지에 다다라 환호성을 외칠 땐 희열을 함께 했다.

카페 콘 레체(커피와 우유가 반반 섞인 음료), 타파스(스페인식 전채요리이자 간식거리, 빵. 에초비, 새우 등 작은 접시에 담겨있어 접시마다 선택해 먹을 수 있다고), 클라라 콘 리몬 (생맥주와 레몬즙을 반씩 섞어서 만드는 옅은 알코올 음료수), 뽈보 (pulpo, 문어. 스페인에서 뽈보로 가장 유명한 도시 멜리데에가면 꼭 먹을 것) 같은 스페인 곳곳의 풍경과 음식 얘기에선 마음이 달뜬 나머지 자세를 고쳐 앉거나 심호흡을 하기도 했다.



문득, ‘과연 나에게 순례의 자격이 있을까’ 물었다. ‘헬레나’라는 세례명이 있지만 성당은 그저 언니 오빠들과 뛰놀던 추억의 공간까지의 기억이 전부다. 때문에 지난 역사 속 순례자들의 순례길이란 점에서 적당한 거리감과 생소함이 교차했다. 입안에 착 감돌지 못하는 ‘순례’라는 단어가 버석버석 어렵게 씹혔다.

카미노 (산티아고 가는 길)는 단순히 휴식을 취하러 떠나는 여행지가 결코 아니다. 자아를 찾고 나 자신을 관찰하는 시간을 갖기 위한 길이다. 하느님을 만나고 그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고행을 감내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그래서일까.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한결 차분하고 따뜻한 배려심이 넘친다. 나보다 더 힘들어하는 이에게 마지막 비상약을 건네주고 뒤쳐진 동료를 위해 그의 배낭을 짊어지고 온 길을 다시 밟는다. 내 두 손에 온기를 불어 넣어 퉁퉁 부어오른 남의 발바닥을 쓱싹쓱싹 문지르는가 하면 서로의 어깨를 마사지 하며 피로를 덜어낸다.



1982년 로마 교황이 그곳을 방문한 계기로 유네스코가 유럽 문화유산으로 지정했고 1993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해마다 600만 여 명의 사람들이 이곳으로 온다. <연금술사>의 저자 파울로 코엘료도 서른 아홉 살때 이 길을 순례했다. 직장을 때려치우고 나온 직후였다. 이후 그는 자신이 진정 꾸고 있던 꿈에 매진할 수 있었고 세계적인 베스트 셀러 작가가 됐다. 그것이 비단 산티아고덕분이라고 단정짓긴 어렵지만 부정하기도 쉽지 않다. 아마 그 역시 내가 아니면 걸을 수 없는, 기다리지만 다가오지는 않는 그 길을 걷고 또 걸으면서 진심으로 두근거리는 일이 뭘까에 대해 고민하지 않았을까.

언젠가 밟을 카미노에 마음은 벌써 스페인 근처 어딘가를 서성이고 있다. 혼자일지 곁에 누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절대로 걷게 될 길이란 것엔 의심이 없다. 이토록 걷는 다는 것을 갈망한 적이 있었을까. '순례' 란 말을 하기엔 아직은 비좁고 어리석지만 그 이유 때문에라도 산티아고에 꼭 닿기로 한다. 


**
사진 가져온 곳 **
http://www.io-warnemuende.de/christa-pohl-cv.html
http://www.sacred-destinations.com/spain/camino-de-santiago.htm



산티아고의 두 여자 - 8점
권현정.구지현 지음/김&정

 
 

<함께 읽고 싶은 책! >

순례자 - 6점
파울로 코엘료 지음, 박명숙 옮김/문학동네
인생은 아름다워 - 6점
남궁문 지음/조형교육
소심하고 겁 많고 까탈스러운 여자 혼자 떠나는 걷기 여행 2 - 6점
김남희 지음/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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