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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알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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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아가 슬아 되다, 끝내주는 인생 일간 이슬아를 구독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슬아 인스타그램에서 행보를 지켜보던 시절이었다. 어? 얘 뭐야? 하면서 들여다보게 됐었다. 키치 한 무드로 눈길을 사로잡았던 그였다. 촌스러워서 획기적이었다. 난 획기적인 걸 좋아하니까. 획기적 (劃期的) 어떤 과정이나 분야에서 전혀 새로운 시기를 열어 놓을 만큼 뚜렷이 구분되는 것. 슬아를 한 해 두 해 지켜보다가 특유의 성적 매력을 흘리는 묘한 끼가 읽혀서 살짝 피곤했다. 매일의 글을 보내고 때로 정중하게 마감이 늦어졌음을 알리거나 그 밖의 양해를 구하는 글들이 똑 부러지고 예의를 다한 태도였지만 마음 쓰지 말아 달라는 당부 같아서 마음 두길 멈추었다. 다시 한 해 두 해가 흘렀다. 이젠 내 주변에 슬아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최근 그의 경향신문 칼럼을 읽고 ..
바닷마을 다이어리, 여름 제주 바닷마을 다이어리, 라고 이름 붙이고 기다린 내내 설렜던 여름 여행. 집 앞바다가 아들들과 놀아주고 파도쳐주고 윤슬 반짝여준. 여행 내내 음식 내어주고 방문 열어준 법환동 섬마을 친구들의 바다만큼 큰 환대 속에서 오순도순 연결돼 살가운 챙김을 받은. 매일 어둠으로 소멸하는 밤 앞에서 ‘다시’ 오늘이야, 시작이야, 정신을 똑띠 차리고 맞이한 아침 대신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흐르는 시간이 유연한 춤처럼 리듬이고 숨이었던. 이 경험은 오랜 기억이 될 거라고 알아챘다. 처음으로 감당할 수 없는 걸 감당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내 너머의 무엇이든 흐르렴 하는 긍정의 마음이었다. 섬의 친구와 바다 바람 파도 비 그리고 아들의 닮고 싶은 동심이 용기가 되었다.
엄마의 손편지 #1. 기대라는 사랑 꿈을 펼쳐라 일과 사랑을 잘 꾸려라 건강을 보살펴라 능력있는 여성으로 살아가라 동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라 다 잘될거야 . 엄마의 손편지를 받고 까매졌다. 기대와 바람의 말들의 나열 사랑인지 알면서도 내 마음에 들여 놓을 자리가 없다. 기대의 말을 사랑으로 듣고 자랐다. 응원가 같은 긍정의 말들이지만 기대는 불충분한 상태를 거울로 비춘다는 걸 이미 알게 된, 마흔의 나다. 기대의 말로 사랑을 받은 사람은 자기 자신을 온전히 사랑하기까지 더디다. 배운대로 기대의 말로 사랑을 하느라 늘 불충분한 것에게 먹이를 줬다. 지금이 나의 꿈이고 이미 이뤘고 이대로 괜찮고 그대로 충분하다는 ... 사랑 ... 이 글은 엄마를 원망하는 글이 아니다. 나란 아이가 자라 이 부족한 사랑을 사는 구나 발견한 결정적 순간의 ..
고잉홈 프로젝트, 손열음의 춤과 빛 손열음은 하이힐을 신고 무대 계단을 총총 뛰듯 걷는다. 건강한 사람의 발걸음. 온몸으로 들썩이는 때로 후둑 물 흐르듯 손 끝까지 힘을 놓고 떨어트린다. 그의 연주는 춤이다. 아름답다. 건강한 사람의 빛. 나는 여기 분들이 숨까지 맞추는 정성을 듣는다. 현과 현이 공기 안에서 부딪히고 울리고 번지는 섬세한 감각을 알아챈다. 오케스트라 연주를 볼 때면 늘 저 모습이 우리 팀이고 내 리더십이라면 ... 우와 우와 원한다. 때로 눈을 감고 한분 한분의 몰입이 만드는 눈이 질끈 감기는 쨍한 에너지 너머로 훌쩍 던져지는 상상을 한다. 그 기분이 호화스럽다. 2년째 고잉홈 프로젝트. 낯익은 연주자들을 꾹꾹 눈에 담고 반가운 마음 인사를 보낸다. '그대로'라는 키워드에 '감사'라는 의미를 붙인다.
보통날의 여행 #1. 제주도 서귀포 북카페와 맛집과 숙소, '알맞은 시간'에 '괜찮은 부엌'에서 내 생의 가장 부자인 나날이다. 시간을 이끄는 자의 위엄을 산다. 회사 생활을 정리하고 내 브랜드를 런칭하고 최고 중에 최고로 꼽는 건 바로 이 ‘시간’이다. 돈의 속성 김승호 작가도 자기 사업을 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지만, 스스로 시간을 통제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어쩌면 유일한 직업일 수 있다고 얘기했다. 그 곳이 어디든, 일을 하면 되는 것이니 평일, 보통날에 훌쩍 제주로 날았다. 티겟이 저렴했고 런칭한 하이그루 브랜드의 첫 프로모션의 결과지를 받아 안았으니 웅얼거리는 마음에게 귀 기울이고 싶었고 기발한 뇌는 무용한 시간 안에서 문득, 출현하는 법이니까. 무엇보다 딱히 제주까지 갈 필요가 없었으나 가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이유는 너무나 결정적이었다. 생에 첫 예산을 설정하고 여행을 떠났다. 놀랍지 ..
꼬마의 하루, 나의 슬픔과 행복 잠에서 덜 깬 꼬물거리는 꼬마를 가만히 카메라에 담은 아침. 이 고요와 평화의 아침이 허락된 데에 감사와 상실을 가지는 날들이 이어지는구나. "꼭 와야돼! 꼭 와야 돼!" 수차례 약속을 받아내는 너. 이런 날마다 엄마의 부재로 부족했을 마음들이 합창하듯 항의하듯 소리치는 것 같다. 꼬마의 조급하고 간절한 약속의 말들 앞에서 헝클어졌을 네 지난 마음을 읽는다. 내가 제일 잘하는, 상쾌한 페르소나를 유지하면서 쿨하게 대답해 주기. 꼭꼭! 갈 거야! 걱정 마! (사랑해, 사랑해.) 행사 시작하기 2분 전. 역시 우리의 약속 시간보다 20분이나 늦었다. 아니나 다를까, 고개가 빠지도록 날 찾는 꼬마에게 뒷자리 멀리서 두 팔을 크게 휘저으면서 인사를 보낸다. 그제야 안심한 듯, 세상 전부의 사랑을 준 훌륭한 엄마..
23 여름 새벽의 기록 정말 오랜만에 좋아하는 새벽에 눈이 떠졌다. am 4: 30. 취침 시간이 뒤로 밀리면서 아침에 일어나는 일이 허덕여지는 게 아팠는데 오늘은 눈을 뜬 순간부터 좋구나. 알람 소리로 아침을 맞는 게 싫어하는 일 중에 하나라는 걸, 어제, 1시간 가까이 10분 간격으로 울리는 알람을 아예 지울 때까지의 소란과 피로에 대해 떠올린다. 싫어하는 걸 잘 아는 사람, 이다. 싫은 것을 다른 의미로 되새김질해야 하구나, 생각한다. 무엇이 싫어서 무엇을 바란, “나는 000 하고 싶다, 나는 000 바란다” 같은 기도의 마음을 외고 적고 살핀지 긴 세월이 흘렀다. 숭고한 바람이 나쁠리 없다 믿고 산 세월인데 이제야 불충분한 갈망들이 무의식이 되도록 노력한 셈이지 않나, 묻게 된다. "이대로 충분하고 매 순간이 성장이다..
마흔에 읽는 니체, 를 읽다가 오늘의 나는 어제 내 선택의 결과다. 나는 어떤 시간은 실패했고 어떤 선택은 후회한다. 인생이 점이 아니라 선이라 믿고 물처럼 흘러 다른 의미로 제자리를 찾을 때를 기다릴 뿐. "모든 고통과 쾌락, 근심과 염려, 크고 작은 온갖 일이 하나도 빠지지 않고 되풀이 된다면, 모든 것은 가고, 모든 것은 되돌아 온다면” 이라는 영원회귀는 아이러니 하게도, 지금 이 순간은 단 한 번밖에 없다는 의미겠지. 오랜만에 니체를 다시 읽다가 언제나처럼 위로 받는다. 니체는 고통 그리고 상실의 스스로를 발견하라고 엉덩이를 툭툭 걷어 차는 사람. 놀이에 몰두하는 아기처럼 자기의 몰락한 삶조차 성스럽게 긍정하며 살아가라고 괜찮다고 해 주는 유일한 분. 아무리 부족하고 힘든 우리 삶도 아름다운 삶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