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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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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하지 않은 눈 2012. 12. 5. 흰 눈이 펑펑 쏟아진 초겨울의 느낌이 어찌나 생경한지 마치 태어나 처음 겨울을 맞은 듯 멍하게 창밖만 바라봤다. 금세 발목 높이까지 쌓인 눈밭을 거닐고도 싶었지만, 그리할 수 없는 신세라 단념했다. 오후 늦게야 유치원에서 돌아오는 아이 마중 나가며 감칠맛 나게 눈 위를 걸었는데 그 기분이 또 뭐랄까... 특별하지 않았다. 하얀 눈이 사방에 펼쳐졌는데 이토록 무감할 수 있다니. 나는 자라는 중일까 작아지는 중일까. 문득 그간 의식적으로 들여다보지 않은 내 안의 내가 궁금해졌다.
논산에서 만난 그녀 논산. 태어나 처음 와보는 곳이다. 사진을 취미 삼거나 뜻을 둔 80여 명의 사람들과 함께 왔다. 우리는 논산의 면면을 주어진 두 시간 동안 카메라에 담아야 한다. 난 사진을 처음 배우기 시작한 그때처럼 재래시장 주변을 누비고 싶어졌다. 고단한 삶의 풍경을 사진 찍는 다는 건 미안한 일이지만, 한편 욕심나는 일이기도 하다. 그 사실을 잘 알아 그들의 모습을 드라마틱하게 찍고픈 마음은 경계하기로 한다. 찍는 이의 마음과 찍힌 이의 마음은 같아야 하므로. 사진은 최후로 두고 관계 맺음을 최선에 둔다. 큰 카메라를 둘러메고 골목길을 어슬렁거리는 이방인을 쏘아보는 눈이 한둘이 아니다. 머쓱해져 슬금슬금 돌아 호박이며 가지며 색색의 야채들을 찍거나, 기우는 폐가의 창을 찍을 뿐. 손님이라곤 그림자도 안 뵈는 가게..
새벽 산책 새벽 산책으로 시작한 하루 한젤이가 이른 아침 잠에서 깼다. 어젯밤 일찍 잠들어 신나했는데... 역시 모든 일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인가 보다. 잠결 무거운 몸 일으키기가 살짝 고역이지만, 덕분에 새벽 산책길에 나섰다. 떠오르는 태양과 울어대는 닭과 지저귀는 새들과 함께 할 수 있다니. 서울이었으면 꿈도 못 꿀 일이다. 상쾌한 기분으로 맞이한 아침상은 계란에 김과 오징어무침만으로도 충분하다. 입 짧은 아이도 평소와 다르게 한 그릇 뚝딱 먹어주니 괜시리 뿌듯하다. 실컷 놀아도 겨우 오전 열 시. 책 읽는 엄마 옆에서, 아이는 벌레 잡기 놀이에 한창 집중하다 제법 용감해진 스스로의 모습이 마음에 드는지 으쓱해하며 오전 잠에 스르르 빠진다. 지칠 줄 모르게 지저귀는 이름 모를 새들의 재잘거림이 여느 노랫소리만큼..
제주도 한달살기, 한젤이와의 추억 친절한 제주도, 여전한 협재 가는 날이 장날이었다. 한라 도서관은 매 수요일에 휴관이다. 상심한 한젤이가 징징 거리는데, 지나던 한 분이 근처 설문대어린이도서관이 있단 정보를 건네주신다. 당장 목적지로 설정, navi의 안내에 따라 그러나 헤매면서, 겨우 찾아 도착했다. 알뜰한 손길이 엿보이는 아담한 공간에 들어서자 아이가 신이 나, 역시나 공룡 이야기 그림책을 찾는다. 기대도 안했는데 간단한 회원 가입 절차를 마치면 도서 대여도 가능하단다. 잠시 머무는 여행자에게도 조건 없이 읽고 돌려달라며 책을 빌려주는 친절한 제주도. 고맙고 또 고맙다. 햇볕이 너무 좋아 또 다시 바다로 향했다. 애월 쪽에 숙소가 있어 가까운 협재해수욕장엔 연속 이틀째 방문이다. 하늘에 태양빛이 가득해도 아직은 제주 바람이 제법 쌀..
제주, 다섯살 꼬마와 잠시 머물기로 제주가는 날. 드디어 출발 좀처럼 흥이 나지 않았다. 잊지 말기로 한 것들을 빠트리고 온 것에 자책했다. 예를 들면 안경... 같은 아주 중요한. 챙겼으면 좋았을 걸 하는 것도 하나 둘 떠올리니 마음이 가라앉았다. 예를 들어 고무장갑 같은. 마음만큼 몸도 천근만근이다. 태동이 멈출 기세를 보이지 않아 무심했던 손길로 토닥토닥 부른 배를 만졌다. 뱃속 나에게도 신경 좀 써달라는 나름의 신호일까. 하루 먼저 도착한 광주에서 장흥 노력항까지 가는 길도 순탄치 않았다. 말썽 피우기로 유명한 올레navi 덕분에 한바탕 길을 헤매고 겨우 도착했다. 다행히 다섯 살 한젤군이 지루했을 시간을 의젓하게 참아주었다. 노력항에서 출항한 오렌지호는 좌석도 화장실도 생각보다 편안하고 깔끔했다. 이만하면 뱃길 제주행은 추천코스다..
변함없다는 듯 오월이 왔다. 한없이 공허했던 마음에 기대가 차츰 차오른다. 퇴사 후 곧장 제주행을 계획했다. 어떤 조건도 따지지 않고 그저 해왔던 대로 요동치는 심장 소리를 존중한 결정이었다. 주위의 걱정 어린 시선 역시 모르는 바 아니지만 용기내고 싶었다. 예전의 나답게. 문득 엄습하는 두려움과 불안함을 극복하는 과제를 안고, 여전한 헛헛함은 메말라 죽어가는 식물과 말 섞으며 해체 중이다. 고요하게 사뿐사뿐 새 길을 걷고 싶다.
삼십대 삼십대 _ 심보선 나 다 자랐다, 삼십대, 청춘은 껌처럼 씹고 버렸다, 가끔 눈물이 흘렀으나 그것을 기적이라 믿지 않았다, 다만 깜짝 놀라 친구들에게 전화질이나 해댈 뿐, 뭐 하고 사니, 산책은 나의 종교, 하품은 나의 기도문, 귀의할 곳이 있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지, 공원에 나가 사진도 찍고 김밥도 먹었다, 평화로웠으나, 삼십대, 평화가 그리 믿을 만한 것이겠나, 비행운에 할퀴운 하늘이 순식간에 아무는 것을 잔디밭에 누워 바라보았다, 내 속 어딘가에 고여 있는 하얀 피, 꿈속에, 니가 나타났다, 다음 날 꿈에도, 같은 자리에 니가 서 있었다, 가까이 가보니 너랑 닮은 새였다(제발 날아가지 마), 삼십대, 다 자랐는데 왜 사나, 사랑은 여전히 오는가, 여전히 아픈가, 여전히 신열에 몸 들뜨나, 산책에 ..
고요한 밤 2012. 3. 우리 함께. 특히 이번주는 강행군이었다. 오빠의 도움 없이 총 열 차례의 아침 저녁상을 차렸다. 햄김말이밥 같은 좀 찔리는 식단도 있지만, 미역국과 떡국은 내 입맛에도 일품, 대체로 잘 해냈다. 역시 그 누구의 도움 없이 입히고 씻기고 재우고 (유치원)보내고 받는 일도 온전히 스스로 해냈다. 다행히 꼴 안내고 새로운 유치원에 그럭저럭 적응해준 아이 덕분이다. 어제는 친구와 아옹다옹하다가 친구의 안쪽 허벅지를 물더라는 담임선생님의 우려 섞인 전화를 받았었다. 유난히 기분이 좋아 웃으며 하원하던 날이었는데 어떤 승리감을 맛 본걸까. 궁금하지만 만 4살이 채 안된 아이의 속을 아무리 엄마라도 알 길이 없다. 이렇게 2012년의 3월이 가고 있다. 금요일 밤. 드문 일인데, 아이가 초저녁에 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