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Diary/하루마다

"내가 알고 싶지 않았던 것은 가족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구나"

 

 

 

엄마 아빠 곁에서 하룻밤 막내딸로 살았다. 축적된 오랜 감정을 되살리지 않고 싶었다. 새로운 정보를 구하고 기억을 재편하고 싶었다. 엄마는 창 밖에 새가 날면 “어머 엄마가 날 보러 왔나.” 하면서 반가워했다. 할머니를 이만큼이나 그리워하는 줄 몰랐다. 어떻게 모를 수 있지. 모르는 게 많다.

 

 

 

엄마가 할머니를 너무 좋아하니까 나도 할머니를 천천히 뵈었다. 할머니는 기백의 호랑이 같은 인상이다. 할머니 가 직접 뜬 예쁜 것들이 집안 곳곳에 즐비했고, 그 시절 남자들과도 술잔을 부딪쳐가며 술을 쫙쫙 들이켰다는. 엄마가 기억하는 할머니 얘길 한참 들었다. 엄마는 8년 만에 낳은 첫 딸이라 애지중지 귀하게 컸다. 갑자기 돌아가신 뒤로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을 만큼. 지금도 새로운 걸 해보자 싶으면 가슴이 콩닥거리는 게 두렵다고 했다.

 

 

 

사진 속 젊은 아빠 품에는 세 딸이 번갈아 쏙쏙 안겨 있다. 그러고 보니 아빠한테 아들을 낳았어야 했다거나, 딸들이니까 이래라저래라 하는 말들, 언니한테 잘해라 본받아라 같은 얘길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걸레질하는 아빠 등 위에 올라 타 왕 놀이 했던 기억, 아빠 러닝셔츠에 풍기던 깨끗한 비누 냄새가 좋아서 킁킁거리며 잠든 기억이 마흔 중반인 지금도 그대로 포개져 있다. 아빠는 어린 나이에 진돗개 두 마리 데리고 진도에서 서울로 상경해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삶을 살아냈는데. 아마 엄마에게 폭 안겨 웃고 울면서 생떼 한번 시원하게 부려보고 싶진 않을까. 슬픈 꼬마가 가슴속에 숨어 지내진 않을까.

 

아빠가 찍어준 사진이 참 많네. 아빠가 우리들 데리고 다니면서 여기 꽃 옆에 서봐, 눈 위에 누워봐, 저 위에서 고개를 내밀어봐 했을 그때를 상상해 본다. 나한텐 사진을 찍는다는 건 사랑해 사랑해 같은 말이라서. 

 

늘 집에만 가면 서둘러 일어나고 싶었는데 어쩐지 더 머물고 싶었다. 한밤 더 자고 갈 거지? 씩 웃는

아빠가 귀여워서 코끝이 시큰했다.   

 


 

 

한 순간 멀어졌다고 생각했다.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들리지 않을만큼 먼 거리의 사람들이려니 했다.  스스로 거리를 두면서 기특하다고 독립된 자아를 가졌다고 의기양양하던 시절도 있었다. 직장을 옮기고  애인을 옮기고 도시를 옮기고 나란 자아의 뿌리내릴 곳을 찾았다. 가족을 저 멀리 두고서. 



이것은 실제로 이루어지지 못한 관계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는 누구였는가? 나는 누구였는가? 왜 우리는 서로 엇갈리기만 했을까? 시간이 조금 더 지난 후 그는 깨달았다. 난 언제나 아버지가 나를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내가 아버지를 알고 싶지 않았던 거구나. 그리고는 또 깨달았다. 내가 알고 싶지 않았던 것은 아버지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구나. 

<상황과 이야기> 중에서, 비비언 고닉 

 

 

어젯밤 잡은 책 속에서 발견한 내 얘기다. 

 

난 언제나 가족들이 나를 알고 싶지 않았는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내가 가족의 서사를 알고 싶지 않았던 거구나. 그리고는 또 깨달았다. 내가 알고 싶지 않았던 것은 가족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구나.





 



반응형

'Diary > 하루마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How do you measure a year in the life?  (0) 2024.08.10
초록댄서  (0) 2024.04.25
만년필로 글쓰기, 몰입의 기쁨  (0) 2024.02.29
빛과 빚  (0) 2024.0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