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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ary

마을에 살며, 사랑하고, 배웁니다.

마을에 살며, 사랑하고, 배웁니다.

영배를 만나다

말리(단우엄마)

 

아이가 야호에서 커가는 몇 년 동안 야호가 세상의 중심인 듯, 야호가족이 혈연가족보다 더 가까운 식구인 듯 살아도 졸업을 하고 몸이 떠나가면 야호는 천천히 과거가 된다. 그래서 현재를 사는 사람들은 지금의 야호를 있게 한 수많은 선배조합원들의 면면과 전설적인 에피소드들을 그저 입에서 입으로 전해 듣거나, 홈페이지에 남아 있는 글들을 읽으며 더듬어보곤 한다. 그런데 가끔씩 현재에 나타나 우리가 늘 과거와 연결되어 있음을 부드럽게 전해주는 사람이 있다. 이름하여 영배. 구영탄스러운 구수한 느낌과는 달리 풀네임은 무려 영화배우. 영배가 소식만 전해주는 전령사는 아니다. 야호의 김장 뒤풀이나 엄마모임 때마다 잇몸 만개한 웃음으로 두손 가득 와인을 들고 나타난다. 그러다 느닷없이 일어나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춤을 춘다. 그것도 무반주로. 처음 본 사람들은 그 춤을 보고 있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라 시선이 우왕좌왕하지만 몇 번 보다보면 내 안의 DNA도 깨어난다. 그녀와 함께 춤추고 싶다는 걸.





영배와 야호를 살았던 조합원들은 말한다. “쓴소리도 달콤하게 잘한다”고, “영배 같은 사람이 하나쯤 있어야 한다”고. 그래서 만나보고 싶었다. 늘 그래왔듯 지금이 제일 힘든 것 같은 야호를 더 씩씩하게 살아갈 수 있는 혜안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여. 마침 얼마 전 야호마을에서 ‘빌리집’을 오픈했다고 한다. 마을의 한 집을 빌려드린다는 의미의 빌리집. 야호에서 만난 아마들이 함께 집을 짓고 마을을 이루어 사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마을살이의 아름다움과 공동체의 배움, 우정의 경험을 바깥의 세계로 확장해나가는 획기적인 시도에 대한 뒷이야기들도 듣고 싶었다. 이렇게 나누고 싶은 얘기가 많았지만, 어쩌다보니 인터뷰 질문을 적어놓은 노트를 펴자마자 와인을 마시기 시작하는 바람에 망했다. 기획 방향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수다만 주구장창 떨었다. 기록도 안하고, 기억도 잘 안 난다. 술잔에 아른거리는 영배의 미소에 기대어 쓴다.

 

 

- 요즘 어떻게 지내나?

 

회사에서 올 연말 휴가를 열흘 정도로 길게 받았다. 마을 친구 몇몇과 열 편의 글을 쓰기로 했다. 하루 한 편씩. 주제는 마음, 여행, 부끄러움이다. 매일 카톡방에서 공유를 하고 서로 피드백을 하는 방식인데, 저 사람 안에 저런 우물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굉장히 깊은 글이 나온다.

 

- 새벽 5시 반에 일어나 ‘미라클 모닝’이라는 것을 한다고 들었는데.

 

나에게 루틴이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것 같다. 좋은 습관을 가지려고 노력한다. 미라클 모닝은 아침에 한 시간 일찍 일어나서 여섯 가지를 하는 것이다. 명상, 운동, 글쓰기, 책읽기, 내 미래를 시각화하기, 확신의 말하기. 새벽에 일어나 명상과 요가를 하고 오늘 무슨 글을 쓸까를 생각한다. 석 달째 꾸준히 해 오고 있는데 최근에는 미래의 시각화와 확신의 말이 중요하단 생각이 든다. 내가 매일 소리내서 뱉는 말이 곧 나이니까. 그 시간에 ‘나는 고통에서 자유롭고 우아하다’라고 말한다. 미래의 시각화는 ‘대자연 안에서 평화로운 관계맺기, 다정한 관계의 장면들’을 그려본다.

 

- 자기표현의 욕구가 강한가.

 

SNS는 다 한다. 인스타, 블로그, 페북, 브런치도 있다. 사진도 좋아하고, 글과 말로 표현하는 것을 좋아한다. 열흘 동안의 글쓰기 프로젝트 말고도 야호에서 만난 친구들 몇몇과 ‘우리같이 글쓰기’ 모임을 2년째 계속해 오고 있다. 한 달에 한 번 쓰고 한 달에 한 번 만난다. 모임을 꾸릴 때는 글쓰기의 동력을 찾고 싶어서였다. 쓰는 힘을 키우고 싶었다. 내가 쓴 글을 읽어주는 독자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었다. 처음 모였을 때는 그리 친한 사이들은 아니었는데 서로를 깊이 들여다보고, 진짜 모습을 확인하는 것이 참 좋다.

 

- 늘 ‘진짜’에 대해 열망하는 것 같다. ‘진짜’라는 것은 무엇이며, 왜 그렇게까지 ‘진짜’를 추구하는지.

 

살면서 뭐 특별한 부분이 없는 애였다. 뒤늦게 발견한 특별한 점 하나가 ‘진짜’ 좋아하는 것만 하고 싶어 하는 열망이었다. 진짜 내가 누구일까 묻는 일이 흥미롭다. 나는 늘 변화하고 성장하고 그만큼 뒷걸음질 친다. 관계 안에서 영향을 주고받으면 또 그만큼 물든다. 그러니 진짜 나를 찾는 여행 중인데, 이것이 인생이라고 하면 사는 의미가 충분하고 앞으로가 궁금하다. 늘 ‘진짜’의 이야기에 매료된다. 록산 게이 <헝거>, 김원영의 <희망 대신 욕망> 같은 에세이에서 온전한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내는 이들의 용기를 발견할 때 ‘진짜’라고 전율한다. 다르덴 형제, 켄 로치,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들을 초기작들까지 전부 다 봤다. ‘진짜’ 이야기를 풀어내는 거 같아 특별히 애정하는 감독들이다.

 

- 건강하고 단단한 개인주의자같은 느낌이다. 개인주의자가 어떻게 마을을 짓고 마을에 속에서 살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개인주의자라서 가능한 거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게 뭔지 정확하게 알기 때문에 타협하지 않고 어렵지 않게 결정했다. 야호살이를 막 시작한 해에 선배들의 소모임인 집짓기 공부모임이 집을 짓는 프로젝트로 막 진행이 시작된 단계였다. 그 일곱 집 중 두세 집과 각별히 친하게 지냈고 당시 중산의 우리집에 금요일 밤이면 초대해 놀았다. 그 선배들은 마을에 집 지어놨으니 새집을 누리고 싶었을텐데 ‘아, 영배가 또 놀자네’ 하면서 무겁게 걸음 하셨을 거다. 난 그 언니 오빠들이 너무 좋았다. 서로 그저 생긴 그대로의 모습을 예뻐해 주는 관계를 성인이 되어서는 만나기 어렵지 않나. 그러다가 아무래도 같이 살아야 할 거 같아서 집짓기 2기 모임을 당시 조합원들에게 제안했고, 비슷한 규모의 가구가 모여 지금의 야호마을 바로 옆 터를 계약 직전에 주인 할아버지 마음이 바뀌는 바람에 엎어졌다. 그대로 포기하려는데 지금의 옆집에 나란히 살고 있는 돌고래가 야호마을과 한 마을처럼 살 수 있는 근거리의 적당한 터를 발견하고 함께 짓자 제안해 줘 덥썩 물었다.

 

 

- 마을을 이루고 함께 시도했던 일들, 기억에 남는 이야기가 있다면.

 

마을에서 일 이년은 이유 없이 모여 놀고 흩어져 놀고 한 겨울엔 각자 조용하게 웅크리고 살다가 봄에 슬슬 다시 모여 비슷하게 어울렸다. 마을 이름의 축제를 연 게 작년이다. ‘야호마을 우리들의 여름 정원’ 이란 타이틀로 지금의 빌리집 주인인 도토리와 수박의 리마인드 웨딩부터 영배펍, 밍글 피짜리아에서 술과 음식을 만들어 나눠 먹고 각 집들의 마당마다 책이며 학용품 마당의 꽃들 등 소소한 것들 펼쳐놨다. 애들은 각종 과일 에이드와 직접 빚은 도자기 그릇을 내놨다. 마을 기타 동아리 사람들이 기타를 연주하고 엄마들은 쿵따리 샤바라 춤도 맞춰 추고 뭐 평소에 노는 일에서 기획을 살짝 더해 좀 더 규모 있게 예쁘게 논 축제였다. 그해 가을에는 좀 더 힘을 내어 외부인까지 초대하는 축제를 기획했는데 코로나와 추운 날씨 탓에 흥행에 성공하지는 못했다.

 

- 주로 마을 안에서 많은 것들을 해결한다. 영배에게 마을이란 어떤 의미인가.

 

내 전부다. 마을이 아니었으면 이 갈증을 어떻게 풀었을지 상상이 안 된다. 마을이 나에게 전부인 이유는 곁에 친구들이 있다는 것이다. 공동체적 이상주의와는 조금 다른 것 같다. 내 식구만이 내 가족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답답한 일이다. 우정에 바탕한 관계망이 내게 주는 안도감 같은 것이 크다. 그 안에서 살고, 사랑하고, 배운다. 마을이 내 삶의 출발인 것 같다.

 

-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 인간의 본질에 대한 탐구심과 낯선 사람에의 경계심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안전한 마을의 울타리를 벗어나 필연적으로 낯선 사람들과 만날 수밖에 없는 ‘빌리집’은 어떻게 시작하게 된 건가.

 

야호마을에 함께 살던 한 집이 이사를 가게 되었는데 일단 내놓은 집이 쉽게 팔리질 않았다. 이 집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생각하다가 미지의 영역으로 한 발 내딛어보자고 마을 친구들과 의기투합했다. 주로 일은 나와 잎싹과 이빨 세 명이 한다. 잎싹은 완전히 낯선 타인이 마을에 들어오는 것을 조심스러워했고, 이빨은 미래에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그만두고 스몰 웨딩같은 작은 사업을 하고 싶어 하는데, 그 그림에 한뼘 다가갈 수 있는 프로젝트라고 생각하고 있다. 사실 난 철저히 사업 마인드다. 빈집이 있으니 에어비앤비나 해볼까라거나, 단순히 공동체에 방문하는 손님을 맞이한다는 마인드로는 안 된다, 청소와 빨래, 체크인과 체크아웃의 연속인 엄연한 숙박업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금의 컨디션을 만드는 데까지 의견을 맞추는데 노력했다. 필요하면 싸우기도 하고.

 

- 역할은 어떻게 분담하고, 수익 배분은 어떻게 하나.

 

전체적인 기획과 홍보를 내가 맡고, 잎싹은 고객관리, 예약, 정산을, 이빨은 시설 관리를 담당한다. 수익은 아직 배분을 논의할 정도는 아니다. 아직은 월세와 청소 인건비 정도 겨우 충당되는 정도다.

 

- 야호에 함께 다니던 꼬꼬마 아이들이 이제 10대가 되어가고 있다. 현재 마을에서 야호 생활이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지.

 

나와 비슷하지 않을까. 야호에서 만난 친구들과 매일 만나니까 새삼스럽지 않지만 문득 음미해보면 특별한 일이다. 작년 코로나 시기에 아이러니하게도 마을 생활이 최고로 만족스러웠던 거 같다. 아이들이 개의치 않고 마당에서 공놀이도 하고 눈이 내리면 눈싸움도 하고 자전거도 타고 마실도 자유롭게 다닐 수 있었다. 코로나와 별개의 자유가 그대로였다. 이곳은 믿을 수 있다는 안정감이 주는 행복이 있다. 야호에서처럼 마을이 그렇다. 관계란 게 변하기 마련이지만, 서로 어려워한 마을 아이들의 관계가 개선되는 모습이 흐뭇하기도 하다. 정말 거짓말처럼 천천히 나아지더라. 자연적인 치유의 힘 같은데 마을이라는 환경이 어느 정도 긍정적인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짐작한다.

 

- 야호가 그리울 때가 있나.

 

그 시절이 늘 그립다. 심지어 갈등들도 그립다. 선하고 옳은 일을 위해서 갈등하는 것도 멋있다. 의견이 첨예하게 부딪쳐도 결국 다 잘 되었으면 좋겠는 선한 의지의 충돌이니까. 사실 야수가 많은 일을 했고, 난 그냥 날라리처럼 즐기기만 한 것 같다. 친구들을 만나고, 아이들을 만나며 관계 맺는 일들이 굉장히 즐거웠다. 다시 들어가래도 들어갈 것 같다. 방모임 열두 번 더 하래도 하겠다. 마지막 연도엔 이사장도 하고 싶었다(웃음). 지금 야호를 다니는 아마들도 무조건 누렸으면 좋겠다.

 

- 앞으로 영배가 꿈꾸는 공동체나 개인적으로 더 시도하고 싶은 일들이 있다면.

 

그런 거 없다. 매일매일 내가 좋은 것에 집중할 뿐. 오늘은 마을 안에서 브런치 데이를 열고 싶다 하면 그냥 연다. 베이글이랑 커피랑 텃밭 토마토랑 별 것 아닌 것들 차려놓고 ‘오세요’ 하면 다들 양손 가득 이것저것 챙겨서 반갑게 찾아온다. 이런 하루들을 좀 더 욕심내어 자주 가지는 거 정도가 꿈이라면 꿈이고. 난 늘 더 충분히 누리고 즐기고 싶어서 애를 쓰는 사람이니 아마 또 일을 벌이겠지. 올해 마을 축제를 작년보다 큰 단위로 기획할 수도 있고. 개인적으로는 마을 사람들 포트레이트 작업을 하고 싶다. 필름카메라에 완전 컬러풀한 컨셉으로. 초록 나무 앞에서 초록 티셔츠 입고, 파란 문 앞에서 파란 치마 입고. 머릿속 구상은 돼 있는데 아직은 돈을 열심히 벌어야 해 좀 바쁘고, 시간이 많아지면 본격적으로 시작해야지. 그 사진 소문이 뉴욕에까지 나서 소호의 갤러리에서 전시도 열고 뉴욕에서 제2의 인생을 사는 판타지가 있다. 웃자고 하는 말 아니고 진짜다.

 

 

I

 

공동육아 어린이집에서 아들 둘 키우고 친구들 만나 집도 짓고 마을 살이도 하고 이런 인터뷰에 응해도 보고 별스럽게 행운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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