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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veler/꿈꾸는 그림

다섯 살 아들과 제주도 한 달 살기, 우리가 얻은 것들

 
2012년 5월
 
41개월 아들과 뱃속 8개월 아들 둘을 데리고 제주도로 향했다. 다니던 직장에 사표를 내고 회사원 생활 중 처음으로 긴 휴식을 가지기 위해서라기보다 사이가 벌어진 큰 아들과 친해지고 싶어서였다.
 

 

"4살이 되기 전에는 데리고 와야 해"

 
아이 낳고 한 달 만에 할머니 품에 안기고 다시 회사로 출근했다. 할머니 댁이 전라도 광주니까, 매주 가던 게 격주가 되고 어떤 때는 한 달에 한 번이 되기도 했다. 갈 때마다 눈동자부터 발가락까지 전부를 동원해 환대해 주던 아들을 꼭 안던, 아니 어쩌면 내가 아들 품에 꼭 안긴 둘의 연결감이 생생하다.
 
당시 영화 마케터였던 나는, 워낭소리가 개봉 전 시사회 관객들의 눈물 바람을 일으킨 현장에 있었다. 예사롭지 않은 기운을 느꼈고 아니나 다를까 100만 관객을 향해 돌진하는데, 이 열풍 속에 함께여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갓 낳은 아기를 할머니 품에 안겨 드리고, 한 달 보름 만에 일의 현장 한가운데로 향했다. 마치 엄마란 사실을 잊은 사람처럼, 다시 이어지는 야근과 회식과 술자리와 춤자리를 마다하지 않고 즐겼다. 신나고 재밌게 살았다. 그 시절 마주친 친하든 멀든 여자 선배들이 하나 둘 조심스레 꺼낸 말들을 듣기 전까지.

 

"4살 전에는 아이를 데리고 와야 해. 더 지나면 너무 멀어질거야."
 

 
스스로 엄마란 사실을 종종 잊은 나인데, 그 말은 또 가슴에 자국으로 새겨졌다. 덕분에, 아들이 우리 나이로 4살이 되는 해 1월에 한없이 아쉬워하시는 할머니에게 단호박으로 선언하고 데리고 왔다. 그날부터 일과 삶이 180도 바뀐다.
 
하루 아침에 일상의 환경이 바뀐 일이 위기처럼 느껴졌을 아기, 저 작은 꼬마가 얼마나 힘들까 같은 생각을 당시에는 하지 못했다. 자다가도 몇 번을 깨서 울며 주름진 팔꿈치를 만져야 진정이 되는 아기여서, 겨우 재웠다 싶어도 다시 울면 머리에 샴푸가 묻은 채로도 달려가 팔꿈치를 내어 준 게 한두 번이 아니다. 회사에는 단축근무를 요청드렸고 감사하게도 받아 주셨다. 워킹맘이 드문 영화의 세계에 별스런 존재가 되었다,고 스스로 생각하며 위축됐다. 서서 출근하고 뛰어 퇴근하는 생활을 이어 갔다. 일에도 육아에도 자신감을 잃고 미천한 존재 같아 우울하던 시절, 선물처럼 둘째가 찾아왔다. 오 신이시어.
 

 

애월 우리집, 한달 70만원 

 
모두가 반대하는 다섯 살 아들과 뱃속 8개월 아들과의 제주도 한 달 살기 프로젝트 강행한 데에는 정말이지 큰 아들과 가깝고 싶어서였다. 내가 낳은 아들이 아직 모래도 밟지 못하고 개미도 무서워하고 두부도 조물조물 못 가지고 놀고 옷 끝이 조금만 젖어도 울어 재끼는 게 어려웠다. 이 모든 성향이 문제처럼 느껴졌고 더 깊게 이해하고 싶었다. 괜한 긴장이라면 풀어주고 싶었고, 우리가 아직 낯설다면 친해지고 싶었다. 내가 도와줄 수 있을 거 같았고, 나란 부재로 키웠을 불안이라면 내 책임이기도 했다. 
 

제주도한달살기

 
애월의 협재 바다 앞 전원주택 이층 집에 한 달에 70만 원으로 계약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 물가로는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이다. 애월 역시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이 단조롭고 소박한 작은 바닷 마을의 느낌이었다. 바다로 향해 바다에서 끝난 하루들. 계란 프라이와 소시지를 구워 주고, 물에 밥을 말아줘도 충분했던 꼬마의 쉬운 밥상과 초저녁에 까무룩 잠이 드는 꼬마의 피로 덕분에 저녁 시간을 만끽했다. 만끽 했다고 하기에는 작은 방 안에서 혼자 사색하고 책을 본 시간들이었다. 서두를지 않아도 되는 아침에는, 마당에서 주워 온 꽃을 서로의 머리에 꽂아 주었다. 그렇게 우리는 점점 친해졌다. 
 
작은 개미와 친구가 돼 인형들과 역할 놀이도 하고, 쌀쌀한 제주에서 온 바다를 가르고 나르는 아들을 매일매일 감상했다. 아들과 떨어져 지낸 시간 동안 나도 모르게 내 안에서 크게 자란 걱정의 나무들이 천천히 몸집을 작게 만들었다. 그 와중에  선물 같이 반짝인 뱃속 둘째가 뱃속에서 소란스럽길래 병원을 찾았더니, 거꾸로 누웠던 마음을 바꿔 제 자리를 찾았단다. 내 마음의 평화 한젤의 자유가 제 위치를 찾아 준 걸지 모르겠다. 우린 모두 연결돼 있으니까. 

 

 

환대와 보살핌, 기쁨의 추억들

 
별안간 이유도 없이 우는 아이랑 씨름하다가 혼이 쏙 빠진 한낮, 아이스크림 먹고 싶어서 그래? 알았어 엄마가 사올게 하고 편의점에 다녀온 사이 깊은 잠에 빠져있는 걸 보고는 아, 잠투정이 이런 거구나, 알아버린 사건은 지금도 자주 생각난다. 그만큼 늦고 무지했던 엄마를 참고 기다린 게 아들. 지금도 비슷하다. 아들은 날 그냥 조건 없이 전부 그대로 엄마로 받는다. 이 관계를 인식할 때마다 뭔가 뭉클하고 한없이 감사한...
 
관광객들에게도 도서를 대여해 주는 제주도의 어린이 도서관의 플렉스. 아들이 아니면 평생 아니 다음 생에도 들러볼 리 없는 공룡랜드에서의 지루하지만 기꺼이 머문 하루, 매일 길냥이를 사랑하고 바다를 돌진하고 바람에 끄떡없는 아들을 발견하는 기쁨. 먼 길에서 함께 머물기 위해 달려온 가족과 친구들의 보살핌.
 

제주도한달살기

 

 

어게인 한달 살기 프로젝트 

 
이제 15살이 된 소년 아들은 우리의 한달 살기 프로젝트를 잘 기억을 잘 못한다. 호랑이 인형을 들고 개미들을 무찌른 기억 정도 어렴풋이 떠오른다고 했다. 그 시절 아들과 둘이서 세계 오지를 여행한 오소희 작가를 흉내냈었다. 천천히 지켜보는 엄마인 척했다. 닮고 싶다고, 멋있다고 동경한 오소희의 엄마상을 따라 하면서 겨우 지금의 내가 되었다. 지금의 나는, 여전히 내가 가장 중요하지만 뭐든 다 돼! 라고 말할 줄 아는 엄마가 되었다. 한계가 없는 엄마란 정체성의 시작이 된 시간일 지 모르겠다. 안 되는 게 없는, 한계가 없는 엄마로 정체화를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우리 둘, 아니 셋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여행의 매 순간을 통과했다. 다시, 퇴사라는 나의 변화로 아이들과의 여행 계획을 구상 중이다. 가슴이 두근거릴만큼 구체적으로 상상하며. 후보에 올려 놓은 캐나다 그리고 후보에 없어도 가게 될 제주도. 우리의 한달 살기 여행이 '다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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