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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ary

23년 12월 매해 일기



23. 12월 31일.

#1. 마흔 셋, 죽고 싶고 살고 싶은

들숨과 날숨이 교차하듯이 죽자 하다 살자 했다. 원래 좀 뻥카가 있는 편이라 말이 연극적이고 원하는 상을 태도로도 연출하는 나지만, 스스럼없고 자유한 척 하다가도 곧잘 죽음을 떠올렸다. 이 말인즉, 아무리 서툴고 엉망인 날 미워하지 않았던 내가 처음으로 안락한 자리를 내주지 않고 나와 대치한 상태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이 우울을 관통하다가 어쩌면 필요한 일이 아닐까 알게 되었고.

죽음을 꺼내보는 인간은 미운 나를 마주하는 고통체, 연약한 상태일텐데 싶어 그의 실재 죽음이 멀지 않게 아파서 자꾸 눈물이 난다.



#2. 배움의 시작, 예슬과 고은을 만나다.



예슬은 시카고에서 박사 과정을 공부하다가 코로나로 얼결에 한국으로 돌아온 나의 바이올린 선생님. 여느 입시생과 다르지 않은 대우를 받으며 그녀 곁에서 배움 중이다. 사업을 시작하는 반쯤 미친 상태를 지나 열정이 타고 남은 재가 된 한 해의 흐름 안에 매주 목요일 그녀에게 향했다. 그 시간만큼은 완전히 다른 세계, 섬세한 현의 몰입이 이어졌다. 활을 잡기 보다 안는 방법과 왼 손가락이 현 위에 단정하게 움직이는 방법, 새끼 손가락이 동그랗게 놓여 힘을 빼고 받아야 하는 악상의 이해, 스케일의 중요성, 모든 연습은 메트로놈과 함께 해야 하는 이유의 얘길 반복해 들었다. 자극된 적 없는 뇌의 한 영역이 반짝 빛을 내는 것 같은 순간이 마치 배움의 본질 같아서 올해 그녀에게 많이 고맙다.



과학쟁이 고은이 자신의 버킷리스트인 재봉 공방을 오픈한지 1년째. 막연하게 상상한 공방지기의 푸근한 인상과는 달라서, 첫 눈에 그녀가 이과형 인간이란 걸 알아챘다. 고은은 1미리의 오차를 허용하지 않고, 재봉틀이든 박음질이든 패턴이든 재단이든  원리를 이해하도록 알려주고 이해했는지 다시 묻는다.

1센치 박음질이 좀 어렵고 좀 귀찮고 대수롭지 않은 나에게, 고은이 반복해 말했다. "1센치 박음질은 정말 !!! 중요해요. 1센치가 중요하지 않은 날은 혜미님이 1센치를 잘 하게 되는 날일 거예요."

이날 이후 1센치가 중요하지 않은, 잘하는 내가 되는 것이 목표가 되었다.  무엇을 잘하기까지 서툰 시간을 마주하는 겸손한 나를 경험한다. "제가 본 중에 가장 진지한 모습이네요, 혜미님 보기 좋아요." 재봉틀 앞에 앉아 동그랗게 말린 어깨 뒤에서 들리는 그녀의 칭찬이 오늘도 실밥과 사투를 벌이는 나의 동력이다.

#3. 나의 고른 숨, 루다



재작년 가을, 문이 닫혀버린 비행기에서 “내릴게요, 숨이 막혀서요.” 라고 말한 꽤나 충격적인 사건. 소란을 일으킬 생각은 없었지만 항공법상의 이유로 지난한 대기와 국정원과의 인터뷰까지. 가슴이 콩닥거리는 걸 너무 알겠어서 제일 마지막에 비행기에 올랐는데 … 결국. 병적인 증상이구나 마음의 정리정돈이 필요하겠지 하는 자가 진단 안에서 일년을 살았다.

아이들과 제주로 향하기 전에 약들을 잔뜩 챙겨 비행기에 오르면서도, 도질까 걱정이 앞섰는데 루다 곁에서 고른 숨이 쉬어졌다. 이 꼬마가 창밖 구름을 보고 환호할 때마다 내 가슴에 온기가 차올랐다. 그 이후로 이 병의 약은 동심이구나 알게 되었다. 올해 내 약이고 기쁨이고 고른 숨이고 생명인 루다. 열두살 꼬마가 매 축구마다 결승골을 넣고 학생 대표로 학교 행사의 사회로 무대에 설 때, 내 곁에서 꼬라지를 내다가 밤마다 내 손을 꼭 잡고 떠들 때 행복했다.

루다와 알콩달콩 잘자 사랑해 떠드는 익숙한 말들 없이 고요하길래, 루다에게 물었더니 “엄마 다시는 그런 얘길 들을 수 없을거야.” 라고 한 날, 가슴이 철렁한 기억. 잘 자라는 이 아이를 내 곁의 약으로 둘 수 없이 훨훨 날도록 떠나보낼 때가 되었구나. 나의 고른 숨을 위해 작은 너에게 기대기를 멈추고 그저 함께 자라기로 한다.

#4. 공명의 관계, 기회를 주는 사람들





퇴사 후 법인 회사를 만들고 새 브랜드를 런칭해 꿈과 야망으로 도전했을 때, 해도 달도 바람도 날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 세상이 날 도와주네, 곧 성공할테니까 기다려 ~~~ 하는 달뜬 마음으로 살았다. 매일 아침  “당신은 성공합니다, 왜냐면 당신이 그걸 원했기 때문이지요.” 라고 말하는 하와이대저택으로 잔뜩 고무되는 나날들. 여러 성과가 있었지만 운영할 자금이 마이너스로 곤두박질 칠 때 멈추길 잘 했지만, 당시에는 하늘도 탓하고, 허튼 소리로 날 고무시킨 하와이대저택도 탓하고, 무모한 스스로를 미워하면서 심연의 까만 속을 헤맸다.

이 과정에서 묻고 따지지 않고 큰 돈을 선뜻 빌려준 잎싹이 있었다. 새 사무실에 커피 머신을 보내고, 브랜드 새 상품을 등록할 때마다 구매해 리뷰를 달아주었다. 때마다 내 실패담을 듣고 "아고 아고 대단타" 하는 맑은 별나무와 굴업도에 가서 진정한 끌어당김의 법칙을 경험했었다. 너덜너덜해진 내가 다시 해보고 싶어 이틀을 고민하다가, 언니 나 재봉틀을 좀 빌릴 수 있을까 부탁했을 때, 재봉틀부터 자수틀까지, 오버록부터 온갖 부자재를 싹 다 차에 실어다 준 물방울이 있었다. 모든 순간에 넌 잘 할거야, 잘 될거야 라고 얘기해주고 위기 때마다 함께 움직여준 너도.

공명,
사상이나 감정, 행동 따위에 공감하여 자기도 그와 같이 따르려 하다.


나에게 이토록 기회를 주는 사람들과 어떤 관계이길래 이 기적이 가능할까 궁금하다가, 어쩌면 우린 공명한 관계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니까 올해도 이어 계속 해야할 일은, 공명이란 방식의 사랑이다. 나는 또 이렇게 한해를 마무리하면서 … 좋은 사랑 곁에 머물기를 선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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