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Diary

(164)
고요한 밤 2012. 3. 우리 함께. 특히 이번주는 강행군이었다. 오빠의 도움 없이 총 열 차례의 아침 저녁상을 차렸다. 햄김말이밥 같은 좀 찔리는 식단도 있지만, 미역국과 떡국은 내 입맛에도 일품, 대체로 잘 해냈다. 역시 그 누구의 도움 없이 입히고 씻기고 재우고 (유치원)보내고 받는 일도 온전히 스스로 해냈다. 다행히 꼴 안내고 새로운 유치원에 그럭저럭 적응해준 아이 덕분이다. 어제는 친구와 아옹다옹하다가 친구의 안쪽 허벅지를 물더라는 담임선생님의 우려 섞인 전화를 받았었다. 유난히 기분이 좋아 웃으며 하원하던 날이었는데 어떤 승리감을 맛 본걸까. 궁금하지만 만 4살이 채 안된 아이의 속을 아무리 엄마라도 알 길이 없다. 이렇게 2012년의 3월이 가고 있다. 금요일 밤. 드문 일인데, 아이가 초저녁에 잠이..
11년 전 2001년 10월 11년 전, 런던에서 몇 달을 머물며 민박집에서 알르바이트를 했었다. 돌아보면 인생의 첫 경험들이 즐비했던 소중한 시간들. 당시엔 30인분 밥물 맞추기 같은 고난이도의 미션들에 스트레스도 꽤나 받았지만, 언제나 막내 동생 돌보듯 보살펴주고 달고 다녀준 주인장 오빠들 덕분에 종종 추억되는 아련한 시절이다. 사진 속 이 날은, 아마도 그동안 벌어둔 여비로 혈혈단신 유럽 여행을 떠나기만을 남겨둔, 런던에서의 마지막 밤이지 싶다. 고마웠다고 아쉽다고 훌쩍이다 취한. 배움도 사랑도 여행길도 머물 곳도 모두 뜻에 따라 이룰 수 있다며 미소짓는 풋풋한 저 여인이 과연 '나'인가. 삶의 많은 것이 결정되고 예정된, 짧은 떠남도 어려워진 현재의 내가 그나마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그는 말했다. ..
시작의 날 2012 3 5 한젤이가 유치원에 입학한다. 우리 때와 비교해 꽤 이르게 시작하는 공동체 생활이라 내 맘도 편치 않은데... 아니나 다를까 유치원 첫 등원 날이 되자 내내 의연했던 한젤에게도 심난한 기색이 엿보인다. 모른 척 하고 등 떠밀어 보낼까 하다가 "한젤이가 오늘 큰 유치원 처음 가는 날이라 두근두근 떨리는구나." 했더니 금세 울 것 같은 얼굴이 돼 품안을 파고 들어온다. “엄마도 처음으로 뭘 할 땐 긴장되고 떨려. 하지만 시작하면 다음번은 쉬워지거든. 해보는 거야. 잘 할 수 있을 거야." 위로가 전해질까 반신반의하며 건넨 한마디인데 다행히 아이 얼굴이 환해진다. 되레 비가 내려 촉촉해진 땅을 얼른 밟아보고 싶다며 문 밖을 나서길 재촉한다. 함께 유치원 버스를 기다리는 동네 형, 누나도 있으니 든든한지 밖에서도..
부끄럽구요 일도 놓고 사랑도 흩어진 기분. 거듭되는 하루들의 의미가 궁금하다. 아이들은 곧 제 삶을 걸어갈 것이니 집착은 말자고 스스로 몇 번씩 각오할 뿐인걸. 그는 매일같이 열중하는 일에 대한 보답을 언젠간 받게 될텐데. 그럼 난, 난 남아 무엇이 될까. 그저 취미를 즐기다 사람을 사귀고 이룬 가정 안에서 행복한 척 웃으며... 빌어먹을 빈말에 위안을 얻으며 살게 될까. 언젠가는 진심을 토해낸 결과물 그 무엇을 세상에 꺼내놓을 수 있을까. 나처럼 약점이 많은 인간이 과연 그 어마어마한 일을 해낼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묻자. 자신은 있냐고. 절대로 지금의 내 모습에서 꿈꾸는 미래의 내 모습을 기대할 수가 없다. 너무나 먼 길. 어쩌면 얼토당토 않은 길. 아룬 것도 가진 것도 집념으로 노력하는 것도 그 어떤 것도 ..
돌고래 세마리 심난한 채 잠들었는데 아름다운 꿈을 꿨다. 허름한 숙소 화장실로 돌고래 세 마리가 찾아왔다. 반짝이는 청색의, 한없이 맨드라운 얼굴을 쓰다듬으며 그들과 물 위를 함께 날았다. 모두 몸집이 작은 아기 돌고래들이었고 나에게 더 없이 살가웠다. 그 중 한 마리가 우리말로 “바다에 잠시 다녀올게.” 했다. 셋이 줄지어 떠난 뒤 바라본 창밖은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파리의 밤이었다. 이렇게 살아지는 건가보다 한다. 요즘은 특별한 걱정 없이 매일 밤 짧게나마 나에게 쏟을 시간이 아니 정력이 있기만을 바랄 뿐 다른 건 없다. 다만 시간이 어서 흘러 내일이 오고 또 다음날이 돼 나이를 먹고 중년이 되어 홀연히 훌쩍 비밀처럼 떠나도 탈 날 것이 없는 미래의 어떤 날을 그린다. 간혹 심난한 것은 마주치는 지금의 내 모습 때..
입춘 지나 진짜 겨울 2012. 2. 입춘이 지나 진짜 겨울을 보았다. 춘천사의 꽁꽁 언 계곡물과 녹을 채비도 마다하고 만끽하라는 듯 지천에 널린 하얀 눈을 밟았다. 춘천 시내에서는 봄 향이 코끝에 걸리더니, 그 산속은 같은 하루란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찬바람이 매서웠다. 태어나 이토록 많은 눈밭을 걸어본 적 없는 아기가 제일 신나 껑충껑충 뛰놀았고, 그 뒤를 종종 걸음으로 쫓은 난 추웠지만 아름다운 겨울의 풍경에 빠져들었다. 돌아오는 차 안이었던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는, 가난한 내가 가진 것들을 나열한 메모가 보인다. 선뜻, 주말 산책을 지휘한 착한 남편과 쑥쑥 자라주는 감각적인 아들. 드디어 익숙해진 안락한 나의 집과 언제든 따뜻한 물이 흐르는 고마운 싱크대. 건강하신 양가 부모님과 아낌없이 사랑 주는 나..
Christmas 2011 2011. 12. 24. Mery Christmas 아무런 기다림도 설렘도 없는 이번 성탄 휴일에 오늘의 평온한 아침이 축복만 같다. 창밖이 온통 하얘 기분이 들뜬 탓도 있지만, 얼른 뛰어나가 풍경 사진에 집중하고 싶단 생각도 들지만, 소싯적 로맨틱한 날이라고 기뻐한 12. 24일의 아무렇지 않은 32살의 아침을 짧게나마 적고 싶어 졌다. 행복을 자주 언급하는 게 유치해 보인다는 건 알지만 이 기분은 정말이지 '행복'인 것 같다. 거실에 울리는 비틀즈의 헤이 주드와 우유 한 잔 밤식빵과 제법 쌀쌀한 거실 공기, 한 움큼 흰 눈모자를 뒤집어쓴 단지 내 자동차들, 저쪽 방에서 책을 읽는 당신까지 ...
다행이다 2011. 11 다행이다. 아무 일 없다는 듯 까무룩 잠들어주어 다행이다. 기운 없는 중에도 여전히 폴리 노래 신나게 따라 불러줘 다행이다. 아직은 꼭 안고 몇 걸음 걸을 수 있을 만큼 작아서 다행이다. 6일째 열이 났지만 고열은 피해 다행이다. 설사와 구토 증세가 금세 사라져 다행이다. 장염과 폐렴으로 번지진 않을 거라는 의사의 말, 다행이다. 행여 심각한 상태로 오래 머물며 아프진 않을까 걱정한 마음이, 이만하길 정말 다행이라고 혼자서 여러 차례 되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