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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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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다섯살 꼬마와 잠시 머물기로 제주가는 날. 드디어 출발 좀처럼 흥이 나지 않았다. 잊지 말기로 한 것들을 빠트리고 온 것에 자책했다. 예를 들면 안경... 같은 아주 중요한. 챙겼으면 좋았을 걸 하는 것도 하나 둘 떠올리니 마음이 가라앉았다. 예를 들어 고무장갑 같은. 마음만큼 몸도 천근만근이다. 태동이 멈출 기세를 보이지 않아 무심했던 손길로 토닥토닥 부른 배를 만졌다. 뱃속 나에게도 신경 좀 써달라는 나름의 신호일까. 하루 먼저 도착한 광주에서 장흥 노력항까지 가는 길도 순탄치 않았다. 말썽 피우기로 유명한 올레navi 덕분에 한바탕 길을 헤매고 겨우 도착했다. 다행히 다섯 살 한젤군이 지루했을 시간을 의젓하게 참아주었다. 노력항에서 출항한 오렌지호는 좌석도 화장실도 생각보다 편안하고 깔끔했다. 이만하면 뱃길 제주행은 추천코스다..
변함없다는 듯 오월이 왔다. 한없이 공허했던 마음에 기대가 차츰 차오른다. 퇴사 후 곧장 제주행을 계획했다. 어떤 조건도 따지지 않고 그저 해왔던 대로 요동치는 심장 소리를 존중한 결정이었다. 주위의 걱정 어린 시선 역시 모르는 바 아니지만 용기내고 싶었다. 예전의 나답게. 문득 엄습하는 두려움과 불안함을 극복하는 과제를 안고, 여전한 헛헛함은 메말라 죽어가는 식물과 말 섞으며 해체 중이다. 고요하게 사뿐사뿐 새 길을 걷고 싶다.
삼십대 삼십대 _ 심보선 나 다 자랐다, 삼십대, 청춘은 껌처럼 씹고 버렸다, 가끔 눈물이 흘렀으나 그것을 기적이라 믿지 않았다, 다만 깜짝 놀라 친구들에게 전화질이나 해댈 뿐, 뭐 하고 사니, 산책은 나의 종교, 하품은 나의 기도문, 귀의할 곳이 있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지, 공원에 나가 사진도 찍고 김밥도 먹었다, 평화로웠으나, 삼십대, 평화가 그리 믿을 만한 것이겠나, 비행운에 할퀴운 하늘이 순식간에 아무는 것을 잔디밭에 누워 바라보았다, 내 속 어딘가에 고여 있는 하얀 피, 꿈속에, 니가 나타났다, 다음 날 꿈에도, 같은 자리에 니가 서 있었다, 가까이 가보니 너랑 닮은 새였다(제발 날아가지 마), 삼십대, 다 자랐는데 왜 사나, 사랑은 여전히 오는가, 여전히 아픈가, 여전히 신열에 몸 들뜨나, 산책에 ..
고요한 밤 2012. 3. 우리 함께. 특히 이번주는 강행군이었다. 오빠의 도움 없이 총 열 차례의 아침 저녁상을 차렸다. 햄김말이밥 같은 좀 찔리는 식단도 있지만, 미역국과 떡국은 내 입맛에도 일품, 대체로 잘 해냈다. 역시 그 누구의 도움 없이 입히고 씻기고 재우고 (유치원)보내고 받는 일도 온전히 스스로 해냈다. 다행히 꼴 안내고 새로운 유치원에 그럭저럭 적응해준 아이 덕분이다. 어제는 친구와 아옹다옹하다가 친구의 안쪽 허벅지를 물더라는 담임선생님의 우려 섞인 전화를 받았었다. 유난히 기분이 좋아 웃으며 하원하던 날이었는데 어떤 승리감을 맛 본걸까. 궁금하지만 만 4살이 채 안된 아이의 속을 아무리 엄마라도 알 길이 없다. 이렇게 2012년의 3월이 가고 있다. 금요일 밤. 드문 일인데, 아이가 초저녁에 잠이..
11년 전 2001년 10월 11년 전, 런던에서 몇 달을 머물며 민박집에서 알르바이트를 했었다. 돌아보면 인생의 첫 경험들이 즐비했던 소중한 시간들. 당시엔 30인분 밥물 맞추기 같은 고난이도의 미션들에 스트레스도 꽤나 받았지만, 언제나 막내 동생 돌보듯 보살펴주고 달고 다녀준 주인장 오빠들 덕분에 종종 추억되는 아련한 시절이다. 사진 속 이 날은, 아마도 그동안 벌어둔 여비로 혈혈단신 유럽 여행을 떠나기만을 남겨둔, 런던에서의 마지막 밤이지 싶다. 고마웠다고 아쉽다고 훌쩍이다 취한. 배움도 사랑도 여행길도 머물 곳도 모두 뜻에 따라 이룰 수 있다며 미소짓는 풋풋한 저 여인이 과연 '나'인가. 삶의 많은 것이 결정되고 예정된, 짧은 떠남도 어려워진 현재의 내가 그나마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그는 말했다. ..
시작의 날 2012 3 5 한젤이가 유치원에 입학한다. 우리 때와 비교해 꽤 이르게 시작하는 공동체 생활이라 내 맘도 편치 않은데... 아니나 다를까 유치원 첫 등원 날이 되자 내내 의연했던 한젤에게도 심난한 기색이 엿보인다. 모른 척 하고 등 떠밀어 보낼까 하다가 "한젤이가 오늘 큰 유치원 처음 가는 날이라 두근두근 떨리는구나." 했더니 금세 울 것 같은 얼굴이 돼 품안을 파고 들어온다. “엄마도 처음으로 뭘 할 땐 긴장되고 떨려. 하지만 시작하면 다음번은 쉬워지거든. 해보는 거야. 잘 할 수 있을 거야." 위로가 전해질까 반신반의하며 건넨 한마디인데 다행히 아이 얼굴이 환해진다. 되레 비가 내려 촉촉해진 땅을 얼른 밟아보고 싶다며 문 밖을 나서길 재촉한다. 함께 유치원 버스를 기다리는 동네 형, 누나도 있으니 든든한지 밖에서도..
부끄럽구요 일도 놓고 사랑도 흩어진 기분. 거듭되는 하루들의 의미가 궁금하다. 아이들은 곧 제 삶을 걸어갈 것이니 집착은 말자고 스스로 몇 번씩 각오할 뿐인걸. 그는 매일같이 열중하는 일에 대한 보답을 언젠간 받게 될텐데. 그럼 난, 난 남아 무엇이 될까. 그저 취미를 즐기다 사람을 사귀고 이룬 가정 안에서 행복한 척 웃으며... 빌어먹을 빈말에 위안을 얻으며 살게 될까. 언젠가는 진심을 토해낸 결과물 그 무엇을 세상에 꺼내놓을 수 있을까. 나처럼 약점이 많은 인간이 과연 그 어마어마한 일을 해낼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묻자. 자신은 있냐고. 절대로 지금의 내 모습에서 꿈꾸는 미래의 내 모습을 기대할 수가 없다. 너무나 먼 길. 어쩌면 얼토당토 않은 길. 아룬 것도 가진 것도 집념으로 노력하는 것도 그 어떤 것도 ..
돌고래 세마리 심난한 채 잠들었는데 아름다운 꿈을 꿨다. 허름한 숙소 화장실로 돌고래 세 마리가 찾아왔다. 반짝이는 청색의, 한없이 맨드라운 얼굴을 쓰다듬으며 그들과 물 위를 함께 날았다. 모두 몸집이 작은 아기 돌고래들이었고 나에게 더 없이 살가웠다. 그 중 한 마리가 우리말로 “바다에 잠시 다녀올게.” 했다. 셋이 줄지어 떠난 뒤 바라본 창밖은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파리의 밤이었다. 이렇게 살아지는 건가보다 한다. 요즘은 특별한 걱정 없이 매일 밤 짧게나마 나에게 쏟을 시간이 아니 정력이 있기만을 바랄 뿐 다른 건 없다. 다만 시간이 어서 흘러 내일이 오고 또 다음날이 돼 나이를 먹고 중년이 되어 홀연히 훌쩍 비밀처럼 떠나도 탈 날 것이 없는 미래의 어떤 날을 그린다. 간혹 심난한 것은 마주치는 지금의 내 모습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