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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알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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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 여행, 흔들린 시간 세 번째 교토여행 세 번째 교토다. 도쿄와 오사카, 후쿠오카와 오키나와를 합치면 우리 제주만큼 자주 들르는 일본. 이곳 특유의 디테일에 감동하게 되고, 입맛의 음식을 가볍게 두루두루 맛볼 수 있으니 여행지로는 정말 취향의 나라다. 극진한 정성이 시스템이 된 나라 이곳 이자카야에서는 저마다 개성의 규칙과 배려를 알아채는 일이 즐겁다. 따뜻한 물수건을 건네는 수고로움이나, 주문이 한참 밀려있지 싶어도 나를 위한 생오이와 생가지를 그 자리에서 썰어 묻혀주고 구워주는 '정직한 태도'에 늘 감동한다. 허름해 보여도 깔끔한 온기가 더해진 화장실 문화는 이곳으로 날 이끄는 결정적인 힘이다. 극진한 정성이 시스템이 된 나라에서 나는 꽤 쾌적한 리듬 속 여행을 즐길 수 있다. 한편 오다가다 마주치는 사람들은 웃음기 없는..
2024년 44살 되고 27살 산다 (-17) 올해 44살이 된다. 작년 나라에서 발표한 중위(중간위치) 나이가 45살이란다. 30년 전에는 28살이었으니, 그 사이 평균 수명이 17년 늘어난 셈이다. 이 기준으로 나는 올해 27살. 마음의 소란과 작별하기로 나에게는 나이도 계절도 날씨도 미세먼지도 코로나도 일상을 흔드는 요소가 되지는 않는다.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것에게 무심하게 구는 건 잘하는 편이니. 대신 마음의 소란한 말들을 따르는 오랜 습관이 있다. 마음에게 복종적인 삶이었달까. 올해는 정든 소란과 작별하기로. 27살 나는, 첫 직장을 떠나 영화사로 일자리를 옮겼는데 인생 마지막이 될 중차대한 결정이라면서 호들갑을 떨던 기억이다. 서른도 전에 마지막을 운운했다니 우습지만, 당시만 해도 20대에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키우는 그런 지난 양..
빛과 빚 울 아빠가 여든 살이 된다. 엄빠 집에 들러 모시고 약속 장소로 향하기로 한 날이다. 엄빠는 이미 코트까지 걸치고 섰는데 약속 2시간 30분 전이다. 엄마, 지금 출발하면 일러. 조금 천천히 나서자. 그래 알았어. 아침은 먹었니? 순식간에 된장국과 두 종류의 폭 익은 김치와 콩자반과 구운 김과 양념장이 차려진다. 뭐 줄 게 없네. 엄마 충분해. 진짜 맛있어. 엄빠는 거의 뛰어다니면서 반찬을 꺼내고 생강차를 타주고 따뜻한 물을 내주고 …. 아, 시간을 거스를 수 있구나. 과거 그대로를 경험하는 신비 체험 같다. 이만큼 고맙게 맛있게 먹지는 못했지만. 아빠 내 마음에 아빠는 60살 정도 같아. 근데 벌써 80이 되셨어요. 그러게 말이다. 아빠 10대 20대 30대 40대 50대 60대 70대 80대 중에 언..
23년 12월 매해 일기 23. 12월 31일. #1. 마흔 셋, 죽고 싶고 살고 싶은 들숨과 날숨이 교차하듯이 죽자 하다 살자 했다. 원래 좀 뻥카가 있는 편이라 말이 연극적이고 원하는 상을 태도로도 연출하는 나지만, 스스럼없고 자유한 척 하다가도 곧잘 죽음을 떠올렸다. 이 말인즉, 아무리 서툴고 엉망인 날 미워하지 않았던 내가 처음으로 안락한 자리를 내주지 않고 나와 대치한 상태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이 우울을 관통하다가 어쩌면 필요한 일이 아닐까 알게 되었고. 죽음을 꺼내보는 인간은 미운 나를 마주하는 고통체, 연약한 상태일텐데 싶어 그의 실재 죽음이 멀지 않게 아파서 자꾸 눈물이 난다. #2. 배움의 시작, 예슬과 고은을 만나다. 예슬은 시카고에서 박사 과정을 공부하다가 코로나로 얼결에 한국으로 돌아온 나의 바이올린 선..
굴업도백패킹, 핸드폰 화장실 전기 없이 전부 가질 수 있는 경험 굴업도 백패킹이 버킷 중 하나지만 어디서 얼마나 배를 타야 닿을지 몰랐다. 유난히 붉게 뽐을 내는 새벽 하늘에 감탄하면서 아무튼 출발. 직감이 늘 나은 선택이라 믿는 내가 작은 텐트 하나를 챙겼는데 이 무모한 여행이 용감히 비상하는데 결정적이었다. 목베개를 안고 여행을 다녔던 나란 사람이 새롭게 다시 번지는 시절이라면 (이거슨 요즘 나의 화두) 다른 공식을 취하고 싶었다. 대부분의 짐을 내려놨다. 당일 아침 단촐한 네 짐과 비교해 여전히 과한 여벌 옷과 에프엠투 필카와 화장품 비상약 파우치 절반을 한번 더 덜었다. 비가 온데, 비가 오면 어뜩해. 비가 오면 맞아야지. 뭐가 걱정돼? 감기 걸릴까봐? 아니, 감기는 백번도 걸릴 수 있는데 꿉꿉하니까. 나 비옷 하나만 살게. 결국 짐이 될 비옷을 챙긴 뒤에 비..
가을에 떠난 부산, 모티 사장님 추천한 영도 list. 매년 이맘때 부산으로 향하던 시절이 있었다. 영화를 보는 게 일이던 날들. 고레에다 히로카즈 신작을 누구보다 먼저 볼 수 있는 게 가장 신났다. 다르덴 형제와 켄로치의 영화 속을 걸었다. 그들 영화로 먼 세계의 낯선 삶을 겪으면 가슴이 저리고 아팠다. 일하는 영화인으로는 애송이였지만 영화인들 가슴의 꿈을 응원하는 마음은 진심이었다. 내게 특별한 ‘부산의 가을’을 다시 찾았다. 밤기차에서 내려 역 앞의 차이나타운을 돌다가 신발원 앞에 늘어선 사람들과 함께 줄을 서려다 말았다. 위스키 한잔을 하려고 구글앱에 검색하니 ‘여기다’ 싶은, 모티 mottie 를 발견했다. 부산역 근처 내가 선 곳에서 700m 라고 해서 호기롭게 걷다가 가파른 골목에게 놀랐다. 나는 부산이 이토록 가파른 도시라는 걸 처음 안다. 이..
슬아가 슬아 되다, 끝내주는 인생 일간 이슬아를 구독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슬아 인스타그램에서 행보를 지켜보던 시절이었다. 어? 얘 뭐야? 하면서 들여다보게 됐었다. 키치 한 무드로 눈길을 사로잡았던 그였다. 촌스러워서 획기적이었다. 난 획기적인 걸 좋아하니까. 획기적 (劃期的) 어떤 과정이나 분야에서 전혀 새로운 시기를 열어 놓을 만큼 뚜렷이 구분되는 것. 슬아를 한 해 두 해 지켜보다가 특유의 성적 매력을 흘리는 묘한 끼가 읽혀서 살짝 피곤했다. 매일의 글을 보내고 때로 정중하게 마감이 늦어졌음을 알리거나 그 밖의 양해를 구하는 글들이 똑 부러지고 예의를 다한 태도였지만 마음 쓰지 말아 달라는 당부 같아서 마음 두길 멈추었다. 다시 한 해 두 해가 흘렀다. 이젠 내 주변에 슬아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최근 그의 경향신문 칼럼을 읽고 ..
바닷마을 다이어리, 여름 제주 바닷마을 다이어리, 라고 이름 붙이고 기다린 내내 설렜던 여름 여행. 집 앞바다가 아들들과 놀아주고 파도쳐주고 윤슬 반짝여준. 여행 내내 음식 내어주고 방문 열어준 법환동 섬마을 친구들의 바다만큼 큰 환대 속에서 오순도순 연결돼 살가운 챙김을 받은. 매일 어둠으로 소멸하는 밤 앞에서 ‘다시’ 오늘이야, 시작이야, 정신을 똑띠 차리고 맞이한 아침 대신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흐르는 시간이 유연한 춤처럼 리듬이고 숨이었던. 이 경험은 오랜 기억이 될 거라고 알아챘다. 처음으로 감당할 수 없는 걸 감당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내 너머의 무엇이든 흐르렴 하는 긍정의 마음이었다. 섬의 친구와 바다 바람 파도 비 그리고 아들의 닮고 싶은 동심이 용기가 되었다.